우리 시사의 벽두를 장식한 『시문학』을 주재한 일과, 또 세칭 ‘기교주의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임화와의 논쟁으로 더 잘 알려진 시인이다. 김영랑 정지용 등 이른바 시문학파의 순수시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시문학 이론가로서는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실제 시작품에 있어서는 그에
만주의적 시인의 실험이 아니다. 단조, 자유시, 산문시의 각 부분에서 그는 실험 이상의 성과를 거둔다.
2. 윤동주 혹은 순결한 젊음
윤동주는 초월적 세계에서 일제에 대한 극복 가능성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고, 이육사에게서 보였던 주자주의적 엄숙주의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식민지 치하의 가
만해 한용운 처럼 현상계에 부재한 님을 갈구하는 혁명가이거나 종교시인도 아니며, 당대의 정지용처럼 이국정취에 취향을 보인 모더니즘의 시인도 아니며, 전통적인 리듬의 바탕 위에 인간의 순수 감정과 우리말의 정교한 아름다움을 탐구한 정통 시인이다. 영랑의 시적 비전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전통이나 민족성을 찾으려는 주제가 소설의 주조를 이룬다. 만주사변이후 일제의 파시즘 강화로 문화통치가 민족말살정책으로 변하는 억압적인 시대여건과 함께 애국계몽기 전기문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 근대 역사소설이 출현하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 허덕이던 작가들이
만 해방 후 시집이 발간된 윤동주만이 어느 정도까지 그러한 작업을 수행했을 따름이다. 특히 김기림의 모더니즘은 현대의 여러 메커니즘을 지성이라는 이름 아래 피상적으로 관찰함으로써 깊이 있게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경험과 결부시키려는 노력을 오히려 희화화한다. 그래서 지
만 누구도 보지 못한 바람을 그것도 칠흑 같은 밤,빈 들판을 지나가는 겨울 바람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입체음향의 효과를 시험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흔히 말발굽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이용한다.그 거리감과 속도감 때문에 말이 달리는 소리는 금시 눈으로 보는 것같은 생
정지용은 감정의 절제를 통하여 시상의 승화를 보인 시인이다. 감정의 절제란 막연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되 직접 노출시키지 않고 제 3의 사물이나 정황을 통하여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 환기하는 것을 뜻한다. 이숭원, 위의 책, p.76
「유리창琉璃
Ⅵ. 부록
*정지용
1)생애
정지용은 1905년 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정태국은 한약에 대한 지식을 익혀 고향에서 한약상을 경영하여 처음에는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때 그 부친이 소실을 두어
김기림,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구인회’를 만들어서 일제하의 한국문학계를 이끌었다.
춘원에 이어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고, ‘조선문학가 동맹’의 준비위원,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 의장단 등을 역임했으며, 1946년에 월북을 하였다.
‘구인회’ 활동의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만큼 ‘내용이 알차고 괜찮은 교과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출판사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의 강세를 보이는 출판사이기에, 교육 출판사에서 나온 교과서는 교육과정을 어떻게 구현하였고, 그들만의 차별성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다양한 검·인정 교과서들 중, 교육현장에서 비상